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크라이나 대기근 (문단 편집) === 카자흐스탄 대기근 === [[파일:ALAGolod.jpg|width=400]] * 카자흐스탄 [[알마티]]에 있는 희생자 추모비. [[1931년]]부터 [[1933년]]까지 [[카자흐스탄]](당시에는 카자흐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일어난 대기근은 홀로도모르보다도 더 참혹했다고 볼 수 있다. 카자흐스탄 대기근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보통은 150만 명 이상, 많이 잡으면 230만 명 정도지만 인구 비율로 따지면 카자흐스탄의 피해가 우크라이나보다 심각한데 카자흐스탄 인구의 1/3이 말그대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특히 카자흐스탄의 주류 민족인 [[카자흐인]]들이 이 기근의 주요 희생자였는데 카자흐인 희생자는 약 130만 명, 카자흐인 민족의 약 38%가 사망했고, 60만여명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소련을 떠났다. 당시 카자흐스탄을 떠난 카자흐인들 중에 [[신장성]] 동북부 [[일리강]] 동부 유역으로 이주한 인구도 많았는데, 1940년대 [[중국국민당]]에서 이들에게 무상으로 말을 징발하자 당시 악몽을 기억하고 있던 카자흐인들이 즉각 봉기하였고 이는 [[동튀르키스탄 제2공화국]]이 성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카자흐스탄의 카자흐인들은 유목 문화를 유지하던 상황이었는데 유목민들이 순순히 가진 가축을 다 내놓고 하루아침에 비좁고 더러운 목화공장에 들어가서 일할 리도 없고 농업집산화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가축을 다 잡아먹다[* 당시 카자흐스탄의 가축 대다수사 농업집산화 저항 과정에서 사라진 것이 통계상으로도 나타난다. 기근 전후로 양, 말, 소 사육 두수가 40~100% 감소하였다.] 엄청난 참극을 겪은 것이었다. 출산율이 높았을 시점이라 인구 복구가 비교적 빨랐음에도 카자흐인들의 인구는 1937년 281만 명으로 1926년에 비해 1/3이나 감소해 버렸고 카자흐인의 민족 공동체/민족 문화가 아예 뿌리뽑혀 버리다시피했다. 대기근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카자흐인의 인구는 우즈벡인과 비슷했지만 대기근이 카자흐스탄에서 집중적으로 벌어지며 카자흐인의 인구가 우즈벡인에게 훨씬 뒤쳐지게 되었고 그 여파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스탈린은 그 자리를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독일계 러시아인]], [[크림 타타르인]], [[체첸인]], [[고려인]]들로 채워 버렸다. 1919~22년의 전시 경제 체제에서 발생한 대기근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고 아직 인구 손실이 완전히 복구되지 않은 상황에서 추가로 대기근이 닥쳐 카자흐스탄 인구가 혁명 이전의 절반 이하로 뚝 떨어져버리자 소련 당국은 인명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러시아인을 대거 카자흐스탄으로 이주시켰고 그 결과 카자흐스탄 내 카자흐인과 러시아인의 인구 비율이 역전되어 버렸다. 이후 카자흐스탄은 '카자흐인의 나라'라는 뜻의 국명과 달리 1988년까지 러시아인의 인구 수가 카자흐인보다 더 많고 1990년대까지도 非카자흐인이 인구의 과반을 점하는 인구 구조를 가지게 되었다. 카자흐스탄의 대기근은 카자흐스탄의 농업집단화를 주도해 대기근을 불러일으킨 서기장 필리프 골로쇼킨(Филипп Исаевич Голощёкин)의 이름을 따 골로쇼킨 [[제노사이드]](Голощекиндік геноцид / Goloşekindık genotsid)라고도 한다. 여담으로 카자흐스탄 대기근이 [[이슬람 극단주의]]를 제어할 목적으로 스탈린이 고의로 일으켰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게시물이 한국 인터넷 상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https://arca.live/b/singbung/34020040?mode=best&target=all&keyword=%EA%B7%B9%EB%8B%A8%EC%A3%BC%EC%9D%98&p=1|#]] 하지만 카자흐인들이 농업 집산화에 저항한 이유는 이들이 [[이슬람 근본주의]]자였기 때문은 아니었다. 유목민 입장에서는 말과 양 같은 가축이 전 재산이나 마찬가지인데 상식적으로 이들에게 하루아침에 이방인들에게 가진 가축을 다 내놓고 비좁은 목화 공장에서 일하라고 시키면 반발이 일어나는 것이 당연했다. 그리고 소련에서 이슬람 근본주의 퇴치 운동을 시행했던 지역은 [[캅카스]]의 [[아제르바이잔]]과 [[다게스탄]] 일대, 그리고 중앙아시아의 타슈켄트, 부하라 등등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소련 초기의 우즈베키스탄과 타지키스탄 일대에서는 [[파란자]] 퇴치 운동 및 바스마치 봉기 진압 등이 일어났다.] 참고로 우즈베키스탄은 카자흐스탄과는 다르게 대기근의 영향이 적었다. [[우즈벡인]]과 카자흐인의 인구는 1930년대 초반까지는 큰 차이가 없었지만 대기근이 카자흐스탄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일어나며 카자흐인의 숫자가 크게 줄었고, 그 결과 우즈벡인이 카자흐인보다 훨씬 많은 인구수를 지니게 되면서 이는 현재에 이른다. 카자흐스탄 대기근이 고의적인 학살이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의 자료들도 있다. 이들의 논리를 정리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볼셰비키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서 활동했고 러시아 공산당과 이후 전 연방 공산당으로 계승됐다. 1922년 이래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의 자진 해산으로 인한 결과, 소련 전국에서 정당은 오직 하나밖에 없었다. 1927년부터 1929년까지 전 연방 공산당(볼)은 집산화와 산업화, 문화 혁명에 대한 노선을 정립했다. 사회주의적 개조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볼셰비키당은 인민들을 집단적으로 학살하기 위한 어떠한 계획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둘째, 기근은 사전에 인위적으로 계획되지 않았다. ≪스탈린의 유목민들: 카자흐스탄 정부와 기근(Stalin’s Nomads: Government and Hunger in Kazakhstan)≫의 저자인 독일의 역사학자 로베르트 킨들러(Robert Kindler)는 1930년대 기근이 비록 참혹했던 결과에도 불구하고 제노사이드가 아니라고 확신한다. 따라서 스탈린주의 지도부는 특정 “소비에트” 민족들(우크라이나인, 카자흐인 등)을 “파괴”하려는 목적을 지니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셋째, 카자흐스탄의 기근은 단순히 1930년대 초반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 이전에도 여러 기근들이 있었고, 대표적으로 적백내전기인 1921년과 1922년에도 심각한 기근이 있었다. 역사학자 이고르 쁴할로프(Igor Pykhalov)는 기근이 러시아 제국에서 지속적으로 출현했고[* 그러나 러시아 제국 시대에 주기적으로 기근이 일어났다는 건 거의 설득력을 잃은 주장이다. 데이비드 문(David Moon), 스티븐 호치(Steven hoch), 보리스 미로노프(Борис миронов) 등의 전문가들은 [[타타르의 멍에]], [[혼란 시대]] 같은 암흑기(더 정확히 말하자면 저런 암흑기의 주요 원인이 전국가적 기근이었다)나 나폴레옹 전쟁, 세계대전 같은 사건들을 제외하면 제정 시대의 기근들은 지역적이었고 전국가적 기근은 없었다는 데 동의한다. 사실 제정 러시아의 농민 빈곤이나 기근 문제는 러시아 혁명의 당위성을 설명하려는 소련 학자들이나 제정 러시아의 후진성을 증명하려는 서방 학자들에 의해 지나친 프레임화가 되었다는 게 정설이다.], 19세기와 20세기 초반에도 만연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소비에트 시기에 이르러 이전 시대까지 만성적으로 일어났던 기근은 명실상부하게 자취를 감췄다. 대규모 기근은 1921년 내전 이후와 1932-33년, 대조국전쟁 종전 이후 1947년에 세 차례에 걸쳐 출현했을 뿐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점을 들어 카자흐스탄 대기근 또한 공산당의 의도적인 학살이 아니라는 것이 일부 학자들이 견해이자 주장이다.[[http://lodong.org/wp/archives/17080?fbclid=IwAR0bh5ialkZs4A82WrvSUj15tM0TLfDoj7rZqfVIsOtcEFWwDhkKha8CU_Y|1932-33년 카자흐스탄 기근은 집단 학살이었는가?]] 1990년대 이후의 카자흐스탄에서 기근을 추모하는 움직임이 높아지고는 있고 실제로 추모 기념물도 세워지고 있지만 우크라이나의 경우처럼 첨예한 정치적 쟁점화는 되고 있지는 않는데 이는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와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가 북부에 살고 있는 러시아인들이 따로 독립운동을 할 가능성을 걱정하다 보니 일부러 그런 것이다. 사실 조상 대에 우크라이나 대기근이라는 비슷한 비극이 있었던 우크라이나계 카자흐스탄인들도 언어·문화적으로 러시아화가 상당히 진행돼서 러시아계에 묻어가는 경향이 강할 뿐더러 일단 카자흐스탄 대기근이 자신들의 입장에서는 다른 민족의 일이다 보니 카자흐스탄 대기근에 대해서는 굳이 부각시키는 일이 없는 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